일본이 1990년대에 지급한 ‘보상금’은 완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앞에 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이나 대만 등 일부 국가/지역의 피해자들은 그 보상 금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받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다, 일본으로서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이해할 수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금’의 보상금을 받은 조선인 위안부는 “반도 채 되지 않는다” (와다 하루키, 2011). 당시, 기금 비판자들은 보상 주체가 ‘민간’이라면서 그 건 책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애매했던 건 ‘보상 주체’가 아니라 실제로는 국가보상에 가까웠는데도 정부의 관여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던 ‘보상 태도’였다.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사업에는 52억 엔에 가까운 돈이 들어갔고 그중 46억 엔 이상, 그러니까 90퍼센트에 가까 운 금액이 정부가 지출한 돈이었다(위의 글). 금액만 보더라도 당시의 보상 주체가 ‘국가’였음(국고의돈이었으니 ‘국민의돈’이기도 하다)은 분명하다.
또 한 가지 기금의 실책은 ‘위안부’들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위안부’가 존재했던 국가는 일본, 대만, 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덜란 드 6개국 및그 지역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들이 처했던 상황은 각각 달 랐다. 말하자면 주둔지의 일반 지정매춘업소에서의 ‘단순매춘’과 전쟁터에 서의 ‘위안’과 ‘위안체제 속의 강간’과 (점령지나 전쟁터에서의 상대국 여성을 향한)‘단순강간’을구별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나 중국이나 필리핀의 경우는 기본적으로는 ‘점령지’, 즉 전 쟁터에서의 일이었다. 물론그안에서도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네덜란드’ 여성과 인도네시아 여성과 조선인 여성은 일본군과의 기본적인 관계가 다르다. 일본군에게 네덜란드 여성은 ‘적의 여자’였지만, 인도네시아의 여성은 점령지의 여성이었고, ○○○ ○○○○ ○○ ○○○ ○○○○○○ ○○○ ○○○○. 그녀들이 입은 피해의 형태는 기본적인 관계에의 해규정되었지만, 그런 기본관계를 벗어난 관계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금’은 그와 같은 개별적 차이도 일본과의 관계의 차이도 구별하지 않았다. 물론 이제껏 ‘위안부’의 정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 가 없는 상황이니,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일본으 로서는 ‘조선인 위안부’가 처음 세상에 나온 만큼, 조선인 위안부의 사례를 중심으로 대처한 것이니 성실한 대응이었다고할수도 있다.
처음 ‘위안부’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는 그 주인공이 ‘조선인 위안부’였으 므로 그들이 식민지배 피해자라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원단체들이 다른 국가와도 연대하게 되면서 ‘위안부’들은 똑같은 ‘전쟁’ 피해자로만 규정되게 된다. 이 점에서도 1990년대 일본의 의식과 대응은 1965년 협정 당시와 다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패전’의 책임만을 졌을뿐식 민지배의 책임은 의식에 없었다.
한국이나 대만에서 보상사업이 원만하게 수행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 보다 이 두 나라가 과거에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관계성에 있다. 그 이유는 ‘조선인 위안부’가 ‘전쟁’을 매개로 한, 명확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로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식민지배하에서 동원된 ‘제국의 피해자’이면 서, ○○○○○○ ○○ ○○ ○○○○ ○○○ ○○ ○ ○○○ ○○○ ○○○○ ○○였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도 한국의 위안부만이 ‘문제’로서 남아 있는 것은 그런 부분이 원인이 된 측면이 크다. 두 나라의 여성들은, 다 른 나라보다 더 ‘긍지‘를 훼손당해서는 안 되는 입장에 있었고 그런 심리적 구조 역시 ‘기금’의 보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든 원인 중의 하나였다.
동시에, 이 두 나라/지역이 냉전구조에 편입된 지역이라는 점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한국에는 ‘기금’에 관한 사실이 일반인들에 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
그 당시 일본 정부가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이라고 명확히 밝혔다면, 그 결과로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기금’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를 넓힐 수있 었다면, 사태는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지 는 않았을 것이다. 즉 1990년대의 일본 정부의 사죄의식과 기금의 관계와, 실제로 이 사업을 뒤에서 지원했던 “외교관의 지지와 성의”, (힘든 일이었지 만) “10년 동안 이를 악물고 실시해온”, “모두 애정을 가지고 신경 써서 열 심히 했던”, “아무런 보답도 명예도 바라지 않”(이상,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편, 227쪽)았던 노력을 동시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설명했더라 면좋았을 것이다. 앞에서, 당시에 ‘애매’했던건‘보상 주체’가 아니라 ‘보상 태도’였다고 말한 것은 그런 뜻이다.
‘기금’은 분명히 위안부에 대한 보상을 실시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반 도 채 되지 않는’ 위안부만이 보상금을 받은, 다시 말해 ‘반 이상’이 보상금 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기금’은 2007년에 해산했고 사업을 종료했다. 그 런데 이때 이후로 일본은 보상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완전 히 잊어버린 듯하다. 1995년 무라야마 전 수상은 아시아를 상대로 했던 전 쟁및식민지 시대에 대해서 전후 최초로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내용을 담은 ‘무라야마 담화’를통해 이렇게 말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더 나아가 세계 평화를 확고히 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 다도 이들 여러 나라와의 사이에 깊은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관계를 키워나가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특히 근현대에 있어서 일본과 근린 아시아 제국과의 관계에 관한 역사 연구를 지원 하고 각국과의 교류를 비약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이두 가지를 축으로 하는 평화우호교류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 현재 힘을 기울이고 있는 전후처리 문 제에 대해서도 일본과 이들 나라와의 신뢰관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저는 앞으 로도 성실히 대응해나가겠습니다.
기금은, 무라야마 전 수상의 ‘전후처리에 성실히 대응’하겠다는 표현의 연장선상에서 발족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금은 절반의 성과밖에 거두 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경위가 어떻든 간에 ‘깊은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 는 관계’를 지향한다고 밝혔던 무라야마 전 수상의 말은 아직 달성되지 못 한 상태다. 기금의 사업이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배경에는 한국 측의 문제 도 없지 않았지만, 결과만 보았을 때 17년 전의 ‘일본’ 정부의 선언—무라 야마 담화가 지향했던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본의 역대 수상들은 자민당 정권 시대에도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말해왔다. 그렇지만 ‘이들 나라와의 신뢰관계를 한층 강화’한 다는 담화의 목표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